처음에는 총액과 할인 폭만 붙들고 있었다. 선급을 조금 더 주면 단가를 낮춰 준다는 말이 솔깃했고, 제작은 어차피 시작될 테니 문제없다고 봤다. 그런데 제작 일정이 밀린 뒤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미 큰돈이 나간 상태에서는 독촉할 말은 있어도 손에 쥔 수단은 없었다. 사진은 계속 왔지만, 그 사진이 우리가 주문한 사양의 완성도를 뜻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잔금을 지나치게 작게 남긴 건 설치 단계에서 발목을 잡았다. 현장에 와서 설비를 세워 놓고도 조건값이 맞지 않는데, 상대는 다음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서둘러 떠났다. 남은 돈이 거의 없으니 다시 오게 만드는 대화도 힘이 빠졌다. 지급 조건은 돈을 언제 보내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시점에 무엇을 받고, 문제가 생기면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계약 전에 돈의 기준부터 맞춘다
- 총 계약금액에 포함된 설비, 예비품, 포장, 운송, 설치 범위를 문서에서 나눠 확인한다.
- 견적 통화와 실제 송금 통화가 같은지 확인한다.
- 중개 수수료, 송금 수수료, 현지 발생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 적어 둔다.
이걸 한 장의 금액으로만 보면 나중에 빠진 항목이 꼭 나온다. 특히 설치와 현장 대응을 포함한다고 이해했는데 상대는 원격 지원만 생각한 경우가 있었다. 금액을 나누자는 뜻이 아니라, 어느 돈이 어느 결과물에 붙어 있는지 보자는 뜻이다. 송금 통화도 계약서와 다르면 환율 얘기가 끼어들면서 협의가 길어진다.

선급금은 제작 착수의 증거와 묶는다
- 선급금 지급 뒤 며칠 안에 받아야 할 제작 일정표를 정한다.
- 제작 전 승인할 도면, 전기 사양, 주요 부품표를 지급 조건에 연결한다.
- 선급금 뒤 설계 변경이 생길 때 금액과 납기를 다시 합의하는 절차를 적는다.
선급은 공장을 움직이게 하는 돈이지만, 많이 보낸다고 제작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승인할 도면도 없이 착수했다가 배치와 전원 사양을 뒤늦게 고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일정 지연의 책임이 흐려졌다. 제작 시작 전에 서로 같은 설비를 보고 있다는 흔적을 남겨야 이후 사진과 진행 보고도 의미가 생긴다.
중도금은 보이는 진척에 붙인다
- 중도금 지급 전에 확인할 조립 상태와 시험 항목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 사진·영상만으로 볼 항목과 화상 입회 또는 현장 검수로 볼 항목을 나눈다.
- 검수에서 빠진 항목이 나오면 보완 뒤 지급한다는 순서를 합의한다.
완성 직전 사진은 대개 그럴듯하다. 하지만 내부 배선, 안전장치 동작, 우리가 쓰는 소재를 넣었을 때의 조건값은 사진 한 장으로 알 수 없었다. 중도금을 ‘제작이 많이 됐을 때’라고만 쓰면 판단하는 쪽은 상대가 된다. 무엇이 보이면 지급하는지 정해 두니, 검수 날에도 말이 덜 엇갈렸다.
잔금은 출하와 현장 대응을 남긴다
- 출하 전 받아야 할 시험 기록, 포장 목록, 예비품 목록을 잔금 조건에 넣는다.
- 선적 전 잔금과 도착 후 잔금을 각각 얼마로 둘지 나눠 본다.
- 설치·시운전 완료를 판단하는 생산 조건과 인수 기준을 적는다.
출하 전 잔금이 필요한 사정은 이해했다. 포장과 선적을 진행하려면 상대도 돈이 든다. 다만 전액이 그때 끝나면 도착 뒤의 문제는 순전히 관계에 기대게 된다. 설치와 시운전은 설비를 켰다는 말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 현장의 전원, 소재, 작업자가 붙었을 때 반복해서 돌아가야 끝이었다.
지급 단계마다 우리 손에 남는 것이 일정표인지, 승인 도면인지, 검수 결과인지, 현장 인수인지 하나씩 놓고 봤다. 그중 빈칸이 있는 단계가 가장 위험했다. 계약서에 좋은 문장이 많아도 돈을 이미 다 보낸 뒤에는 그 문장을 실행시키는 일이 훨씬 어려워졌다.